주일예배 설교

마가(23) -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막9:30-50)

Author
GOSPEL323
Date
2023-03-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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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23) -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9:30-50)

1. 하나님 나라

(1) 누가 크냐 - 제자들의 자리다툼

- 십자가를 앞둔 공생애 마지막 수개월 전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최북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시고 이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신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차례 말씀하셨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제물로 죽으셔야 함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구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성령강림의 하나님 나라(교회)를 알지 못했다.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야고보와 요한이(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을 예수님 좌편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이 다스리는 메시야의 지상천국(?)으로 보인다. 그들은 죄사함의 회개를 통한 성령강림의 하나님 나라를 전혀 알지 못했다.

(2) 제자들 사이의 특권의식 경쟁의식

- 이제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신다.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더 크다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열두 제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첫째부류는 베드로 안드레 형제, 야고보 요한 형제, 네 사람이다. 이들은 벳세다 고향 친구이며 어업 동업자였다. 이들은 제일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둘째부류는 그들보다 늦게 제자가 된 여덟 제자로서, 빌립과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 마태와 도마가 있고, 작은야고보(알페오아들) 셀롯시몬, 다대오유다, 가룟유다가 있다. 누가 크냐 다툼은 어쩌면 이 두 부류 사이의 특권의식, 경쟁의식 때문인지 모른다.

2.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1) 부활이후 성도들은 왕노릇함(계5:10) –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림(계20:6)

① 천국은 한 가족, 어떠한 구별 차별이 없음

-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로 상실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다. 구원은 에덴의 회복과 완성이요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 에덴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경륜 완성이다. 구원은 어느 한 민족 만의 것이 아니다. 민족과 나라는 바벨탑이후 흩어진 동일언어 가족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사람의 후손으로 아담의 자손들이다. 새하늘과 새땅의 하나님 나라에는 민족과 나라, 유대인과 이방인... 어떠한 차별 우열구분도 없다.

-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들의 관계는 어떨까?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주인,,, 어떠한 차별과 구분이 없다(갈4:27).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난 하나의 가족이며 모두가 하나의 성도들이다. 그들 모두는 하나의 공통 경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일이다. 그곳에는 바벨의 혼잡이 없으니, 모든 성도는 언어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다. 오해도 없고, 다툼도 없다. 그곳에서 각자 역할이 있겠지만 그들 사이의 우열구분과 지배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

- 또한 여자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돕는 배필로서 사역할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차별받고 불평등했다.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불평등은 분명 에덴의 모습이 아니다. 양육강식 힘으로 다스리는 죄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새하늘과 새땅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에덴의 본래 창조원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다스리지 않고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할 것이다.

② 에덴을 다스리고 지키는 일 – 돌봄, 유지, 보존, 관리

- 부활이후 새하늘과 새땅에서 성도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곳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성도는 그곳에서 해야 할 어떤 일/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이 회복 완성하신 새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는 것이다(창2:15). 그 일은 거룩한 하나님 백성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다(창1:28). 왕노릇 함이다(계5:10)

- 새하늘과 새땅에서 정복과 다스림은 지키는 것이다. 칼로 다스리는 정복은 범죄 이후 죄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담에게 주신 에덴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키는 것이다.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제 역할을 다하도록 통치함(다스림)이다. 이것이 에덴을 관리하고 지키고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 새하늘과 새땅(새에덴)이 첫에덴과 다른 점은 그곳에 거룩한 백성, 구속받은 아담의 후손들이 가득차 있다는 것 외에 환경적으로는 없다. 첫 에덴과 피조세계는 완전한 곳이다. 에덴동산 밖도 에덴과 같이 완전하다. 그곳은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개척하고 다듬어야 할 곳이 아니다. 에덴동산과 에덴 밖의 차이는 사람이 거하는 유무만 차이가 있고 환경적으로는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피조세계에 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것이다. 그것은 성경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고 에덴에서 아담이 한 일 정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정도에서 멈추자. 새에덴에서 성도는 분명히 첫 아담처럼 그 일을 할 것이다.

③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

- 교회는 새하늘과 새땅 하나님 나라, 새에덴의 모형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령통치 안에서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된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함이 없다면 죄사함 받지 못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없다. 성령통치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2)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마18장)

① 어린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함

- 어린아이는 죄가 없다거나 착함이 아니다. 어른처럼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아이들 역시 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죄인이다. 아이들은 아이들 수준에서의 악함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부모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함에 있다. 아이들의 최고 두려움은 갑작스러운 부모의 부재이다. 아이들은 자기 생명이 부모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알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한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②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해 자기주장이 없음(덜함)

- 어른은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고 자기주체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이런 어른들에게 나타나는 죄의 특징은 자기주장과 교만함이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 죄인으로 자기주인됨의 본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어른에 비교해보면 아이들은 자기주장의 교만이 덜하다. 이 말씀은 아이들은 무조건 구원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른들이 자기주장과 교만함이 있음을 말함이다. 아이들을 빗대어 어른들이 교만 하다는 것을 지적함이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자기주장하고 있고 교만하다. 그것이 죄의 본질이요 죄인의 특징이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가만 생각해보라. 사람은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좋아하고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계속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결국 자기주장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주장을 받아주는 사람은 좋아하고 자기주장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은 싫어한다.

- 어린아이는 심리적 신체적으로 성장해가며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있고 또 사회 에서 아직 자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자기 스스로 완성되었다거나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어른에 비해 자기주장이 없다.

- 마18:3-4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③ 어린아이와 같이 됨은 십자가 자기죽음으로만 얻게 됨

- 성도는 자기주인 되어 살아가는 죄에서 돌이켜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이며 이것은 자기주인됨을 포기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함이다. 그래서 구원 얻은 성도일수록 자기주장이 없어지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진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얻게 된 변화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막9장)

① 누구든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섬겨 구원의 길로 인도하면...

- 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나 여성은 존중받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부속품 소유물 중 하나로 여김을 받았다. 이런 사회에서 본문이 말하는 어린아이를 영접함이란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이웃에 대한 그의 겸손한 섬김 태도를 말함이다. 실제 어린아이를 무조건 어른처럼 대접하고 받들어 모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같이 집에서 아이들을 우상처럼 섬기는 시대에 교회에서도 아이를 왕처럼 모시라는 말이 아니다.

② 누구든지 믿음이 연약한 자 하나를 실족시켜 멸망의 길로 인도하면...

- 일반 세상 공동체에서 가진 자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중심이다. 거기에서 부족하거나 연약한 자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 무시를 당한다.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기주인됨을 포기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이런 교회 내에서 제자들처럼 핵심위치에 있는 자들이 여전히 죄의 모습을 나타내며 자기주장을 함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케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 실족케 함이란 성도간의 단순한 갈등, 상처가 아니다.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악행을 저지르는 죄의 길에 들어서게 함을 말한다. 타락시킴을 말한다. 고린도교회의 지도자중 부도덕한 생활을 함으로 성도들을 실족시킨 일이 있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그들의 삶을 따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는 생명 길에서 사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실족한 것이다. 그중 성경 진리를 왜곡하는 교회지도자들이 받을 벌은 가장 엄중하다.

③ 실족시킨 자는 연자맷돌을 그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고...

- 당시 로마에는 유대인들에게 없는 두 가지 사형법이 있었다. 하나는 반란을 일으킨 자나 극악한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나무에 메달아 죽이는 십자가 처형, 다른 하나는 부모를 죽이거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자의 목에 큰 돌을 메달아 깊은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었다.

- 사람들을 실족케 해 사망의 길로 빠지게 한 자는 똑같이 엄중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본문의 연자맷돌은 나귀가 돌리는 것으로 나귀맷돌이라 불리운다. 사람 손으로 돌리는 일반맷돌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 이런 연자맷돌 같이 큰 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던져진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또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 버리고... 이는 모두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극형에 해당하는 엄중한 일인가를 말해주는 강조법이다. 실제로 신체를 훼손하라는 말이 아니다.

- 막9:42-49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결론 및 적용>하나님은 연약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고 귀히 여기신다.

(1)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

- 죄의 세상은 철저히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 강한 것만 살리고 약하고 모자란 것은 희생시키고 버린다. 동물의 세계, 인간사회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 연약한자 부족한자를 세상에서는 무시하지만 하나님은 소중하게 여기신다. 오히려 천국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 백 마리중 한 마리는 그리 큰 수가 아니다. 어미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금방 채워질 숫자이다. 그런데도 목자는 그 한 마리를 찾아 온 산을 다닌다. 길을 잃은 그 한 마리의 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 낙심하고 실족한 한 영혼이 돌아올 때 하나님은 무엇보다 더 기뻐하심이다.

(2) 교회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자세로 사랑하며 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