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마가(24)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10:17-31)

Author
GOSPEL323
Date
2023-03-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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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24)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7-31)

1. 율법은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1)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보여준다.

-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 강림하여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모세는 이 율법을 다섯 권의 책(오경/토라)에 기록해서 남겼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말라고 명하신 구체적인 행동 계명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토라) 속에 613개의 하나님의 계명이 있다고 정리했다. 십계명은 토라의 613개 계명을 집약한 핵심원리 계명이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토라(613계명)를 말하고, 좁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세겨 주신 십계명이다.

- 율법은 출애굽 하나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 문화와 종교 속에 동화되어 살아왔다. 그들이 부모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배우고 믿었어도, 실제 그들의 삶은 애굽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

- 거룩함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완전함과 초월성이지만, 거룩함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죄에서 벗어나 의를 행하는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삶에서 죄와 의를 가르쳐주시므로 죄의 나라 애굽과 구별되는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을 가르쳐주셨다.

(2) 율법은 성막계시와 함께 구원의 길로 주어졌다.

- 에덴에서 아담은 율법을 지켰을까? 에덴에서 아담은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아갔다. 정확하게 하면, 아담의 삶은 율법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담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다. 범죄 하지 않은 아담이 에덴에서 낳았을 후손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이 땅에 가득한 인류가 되었을 때 어땠을까? 그들도 역시 율법이 요구하는 죄가 없고 의를 행하는 에덴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과 문제없다. 에덴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 죄가 없기 때문이다.

- 율법은 죄인들에게 주셨다. 율법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하나님 나라 에덴의 삶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 범죄 하지 않은 아담 후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 갈등이 없지만, 죄인은 몇 사람만 모여 있어도 충돌하고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율법은 이런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규례들을 가르친다. 율법은 에덴의 모든 것을 가르침이 아니다.

-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 에덴의 삶을 제시하지만 에덴에 들어가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람 속에 있는 죄 때문이다. 613개의 율법계명을 다 지켜도 이 땅에서 죄인은 에덴의 삶을 잠시 원리적으로 체험할 뿐 실제 에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없애고 범죄이전 아담의 모습을 회복해야하기 때문이다.

(3)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지킬 수 있다.

- 율법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율법은 한 번도 행위구원을 말한 적이 없다. 율법은 성막계시와 함께 주셨다. 율법과 성막계시는 분리되지 않는다. 613개의 율법계명은 상당수가 제사와 절기의 성막규례와 연결된다. 성막계시가 곧 율법이다. 율법에는 죄를 씻는 성막계시를 담고 있기에 구원의 길이 된다. 만약 율법에 성막계시가 없다면, 거룩하라는 율법은 멸망의 길이 된다.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백성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출애굽 모든 백성은 광야에서 멸절했을 것이다. 율법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된다.

-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자기 힘으로 지키도록 주어졌다. 율법은 결코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없다. 죄 때문이다. 그래서 속죄제사가 필요했다. 백성은 자기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어 절망한다. 속죄일(욤키프르) 대제사장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때, 백성은 대제사장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다리게 된다.

- 히10:19-20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 율법의 행위로는(doing) 구원을 얻을 수 없다.

① 선한 선생님이여 !

- 부자 청년은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생)을 가르치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생 얻는 방법을 질문했다. 누가는 그를 관원이라고 했다(눅18장) 그는 유대사회에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법 성공한 바른 청년 같다. 그는 예수님을 올무로 잡으려는 바리세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 청년의 질문은 율법을 행함으로 선한 사람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랍비 유대교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다.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을 다 지키므로 거룩해진 선한 사람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누구든지 선해질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즉시 바로잡아 주신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 선함/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다.

②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 문맥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예수님을 선한 랍비/사람으로 생각하는 청년에게 말씀하심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선하지 않다고 하심이 아니다. 선함과 거룩함은 사람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임을 말함이다. 청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모른다. 청년은 예수님을 율법행위로 거룩해진 사람 곧 선한 랍비라고 생각했다. 이는 청년 자신도 율법을 지키면 예수님처럼 선함/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함이다.

- 선함과 거룩함은 사람의 행위로 도달할 수 없다. 선함은 의와 거룩의 다른 말이다. 선함은 사람에게 없다. 선함은 하나님께 속한 신적인 속성이다. 죄인은 율법을 지켜 도달할 수 없다. 거룩함/선함을 율법을 지켜 얻을 수 없다.

- 청년은 무엇을 해야 구원(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십계명과 율법을 다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 얻는 방법을 묻고 있다. 자기가 율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다 지켜도 자신의 죄는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음을 잘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다.

- 하나님 나라의 생명(구원)은 무엇을 행함(doing)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얻고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being) 얻는다.

③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 구원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할 때 얻지 않는다. 복음은 어디에도 무소유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 이 말씀은 율법/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는 청년에게 네 속의 죄는 그대로 있다고 보여주심이다. 청년은 부자였다. 그는 그의 소유물을 중요하게 여겼다. 재물은 그가 버릴 수 없는 핵심가치였다. 죄가 바로 그렇다. 그는 십계명을 다 지켜도 죄의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십계명/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지켜진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막10:19-22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부자 청년은 재물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은 두 주인 비유를 하시며 하나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사람은 재물을 부리고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은 재물욕심에 사로잡힌다. 사람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 네 종류의 밭 비유에서 성도가 미래에 대한 염려와 재물 욕심 때문에 넘어진다고 한다. 이들은 초신자가 아니다. 이들은 환란과 핍박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굳건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신자들이지만 염려와 근심으로 넘어졌다. 재물은 그만큼 강력한 우상이다.

- 마13:21-22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 그리스도인이 되어야(being) 구원 얻을 수 있다.

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

- 영생은 십자가를 믿음으로 얻는다. 죄사함 받고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을 통해 스스로 죄를 벗는 것이 불가능함을 낙타와 바늘귀 비유로 말씀하셨다. 낙타와 바늘귀는 그 대조가 너무 커서 쉽게 납득되지 않지만, 이것은 가장 작은 구멍과 가장 큰 동물을 예로 들어 불가능을 강조하는 과장된 비유법이다.

- 일부 학자는 바늘귀를 현재 예루살렘 성 욥바문에 있는 작은 쪽문이라 말한다. 그 문은 큰 성문을 열지 않고도 사람이 한 두 명씩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작은 문이다. 그 문은 사람이 겨우 다니는 작은 문이라 짐을 실은 낙타는 들어갈 수 없다. 낙타는 짐을 내리고 나서야 겨우 통과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바늘귀(구멍)는 물질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점은 예수님 당시 욥바문에 작은 쪽문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 낙타와 바늘귀 비유는 문자 그대로 불가능을 강조하는 과장된 비유법으로 보는 것이 좋다. 부자가 재물욕심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죄를 버리고 선함/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부자의 재물욕심은 죄를 의미한다.

②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부자가 재물욕심을 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에게 재물욕심이 있음을 드러낼 뿐 재물욕심을 버리게는 못한다. 율법은 결코 죄를 이기게 하지 못한다. 사람이 죄를 버리고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는 사람 스스로가 율법행위를 지켜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정도로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부자가 물질욕심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 부자도 물질욕심을 버리고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

- 가난한 자는 하나님 은혜 없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다. 가난한 자는 재물이 없기 때문에 부자보다 예수님을 따르기 조금 더 쉬울 뿐이다. 가난한 자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 구원은 내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서 온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이다.

- 무소유로 유명한 어느 스님이 있다. 그분은 시세 1천억이 넘는 대원각 7천평을 시주하겠다고 해도 10년간 거부했다. 시주를 받게 되자 그곳에 절을 세우고 떠났다. 본인 책 인세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했다. 그분은 재물욕심이 없었다. 이 분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분은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에 해당하는가? 아니다.

-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과 성령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르다. 자기 힘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 내면의 본성(죄)을 스스로 억제하며 선한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각고의 수행과 노력, 초인적인 결단으로 활시위를 최대한 당긴 채 평생을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사람은 그대로이다. 죄는 여전하다.

- 사람의 본성(죄)는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벗어진다. 구원은 하는 것(doing)이 아니라 되는 것(being)이다.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doing) 선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being) 참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선함은 십자가에서 죄용서 받고 성령 받을 때 얻게 된다. 무소유를 실천한다고 성령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바른 무소유를 할 수 있다. 에덴의 선함,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께서 재물욕심을 버리라고 하시는 이유

- 재물은 내가 부릴 수 있는 종이 아니다. 재물은 나를 지배하는 신이 된다. 죄의 욕심 때문이다. 성도가 재물을 좋아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재물이 있으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물을 의지하고 안심하게 된다.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다.

- 하나님께서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애굽 고센땅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이유가 있다. 그곳은 물이 풍부한 곡창지대이다. 그곳은 지금도 강물이 넘치도록 흐르고 있다. 거기서는 기도가 안된다.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가나안땅(산지)에는 강이 없다. 요단강은 해발 –200m(갈리리)에서 –400m(사해) 아래에서 흐르고 있다. 가나안 산지 성읍들은 요단강물을 끌어 올릴 수 없다. 가나안 산지는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야 살 수 있다. 비가 내려도 땅에 남아있지 않고 골짜기를 따라 모두 흘러가 버린다. 가나안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도하게 된다.

- 신11:10-12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결론 및 적용>현세에 백배를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1) 세상재물과 비교할 수 없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내가 버린 세상 재물의 백배보다 더하다. 그것은 재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삶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구원/영생의 축복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다. 그 누림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버린 집과 전토의 백배보다 더하다.

(2) 핍박을 받아도 능히 이길 힘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