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말라기(1) -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십일조 (말3:1-10)

Author
GOSPEL323
Date
2024-02-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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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1) -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십일조 (3:1-10)

1.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고 나서

(1) 약 100년이 지난 후

- 말라기는 학개 스가랴 이후 약 100년이 지난 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말라기는 아닥사스다 20년 제3차 포로귀환(BC444)으로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난 이후 어느 때에 사역했다. 그때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고 스룹바벨 성전에서 의미 없는 제사를 드리거나 아예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 않고 있었다.

(2) 백성들의 신앙이 나태해져가고 있을 때

- 학개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도, 메시야는 오지 않고 만국의 보배는커녕 여전히 페르시아 속국이다.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치고 이제는 냉냉해졌다. 도대체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도래하며 그리스도는 언제 오시는가? 선지자들의 예언은 현실고통을 잊게 하는 희망고문아닌가? 스룹바벨 성전완공 후 100년쯤 지나니 백성들의 신앙은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 주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고 기다렸으나 2천년이 지나도록 안오셨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종말은 정말 있기는 하는가? 입으로 표현은 못하나 마음으로는 종말은 없는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현대교회 신자들과 같다.

- 세상 끝 날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 우리의 알바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겨진 삶 곧 개인종말론에 집중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침이다. 다니엘 70이래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99.3% 완성 되었고 나머지 한때 두때 반때(42개월, 1260일,3년반) 0.7%만 남아있다. 이 기간을 우리 각 성도 개인에게 주셨다. 구원은 이미 나와 상관없이 성부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 남은 것은 그 구원을 성령 안에서 내게 적용하여 내 자신이 성화되고 부활영화의 몸을 입어 완성되는 것만 남았다. 모든 사람/모든 성도는 마지막 한때 두때 반때를 살고 개인적으로 70이레를 완성하며 마친다. 그 일이 세계종말로 마무리됨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일어날 뿐 우리 자신은 우리 개인에게 주어진 70-80년을 마지막 종말로 생각하며 살아가면 된다.

- 여호와의 열심을 잃어버린 제사장들은 눈멀고 병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신앙적 회의감에 빠진 백성은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도 않았다. 이때 말라기가 학개 스가랴처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며 백성들에게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임할 것을 징표로 예언한다. 말라기의 핵심주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이다. 십일조는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백성들의 느슨해진 신앙을 지적하는 문맥에서 나온다. 말라기 핵심 주제가 십일조는 아니지만 십일조는 우리 신앙생활에 큰 부분이기에 정립이 필요하다. 오늘은 십일조를 알아보자

2.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십일조

(1)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언약을 의미한다.

- 교회에서 십일조 설교는 크게 두 가지 대척점으로 나눠진다. 십일조는 가난에서 벗어날 축복의 통로라는 기복적 설교와 십일조는 신약에는 없다고 십일조폐지를 복음으로 선포하는 극단적 설교이다.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언약 속에서 십일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에서 의무납세로 접근하기에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구약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 언약과 그리스도를 직간접 예표 하듯, 십일조도 그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아야 한다. 십일조는 시내산에서 모세의 율법으로 주어지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야곱에 의해 드려지고 있었다. 십일조의 기원을 율법이 아닌 언약에 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 아브라함의 십일조는(창14장) 축복을 하늘창고에 쌓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가병 318명으로 시날땅 그돌라오멜의 동맹군대를 이기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이는 그 승리가 하나님께서 세겜에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신다는 언약(창12장) 때문임을 확인하고 감사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탈취물들을 하나도 취하지 않고 모두 소돔왕에게 돌려준 것도 “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 사람이 나를 부요케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기드온의 삼백명과 비견되는 일이다. 개인이 네 성읍 왕의 군대를 이긴 것이다. 우리는 한 문장으로 읽어 그런가보다 하지만, 이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원인을 하나님의 언약에 두었다.

- 야곱의 십일조 서원도 아브라함 언약의 연속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꿈을 꾸고 세 가지 서원을 한다. 하나님께서 꿈에 약속하신 대로 자신을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되고, 이 벧엘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자신은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이다(창28장). 이 세 가지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십일조 드린 것과 같은 내용이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고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십일조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과 민족의 언약이 자신에게 이루어졌다는 고백이었다.

- 모세율법의 십일조도 그렇다. 그것도 출애굽 구원을 통해 가나안에 세워질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 언약을 기억하라고 주신 것이다. 출애굽 백성들에게 십일조는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드리는 의미와 같다. 즉 소득의 초태생(처음것)을 드림이다. 이는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함과 동일하다. 생명의 초태생은 단 한번만 드리지만 소득의 초태생(처음것/십일조)은 평생동안 매번소득을 얻을 때마다 반복하며 드린다. 백성은 십일조를 드리며 내가 죄와 사망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는 물질축복이나 구원조건의 그 어떤 개념도 없다.

(2) 너희가 나의 십일조를 도적질하고... (9절)

-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신다(10절)는 말라기의 십일조 본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고대국가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담고 있는 특별한 모델나라였다. 하나님은 열국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

-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열국사이에 제사장 역할을 하는 나라이다(출19장).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인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한다고 했다. 그 일은 성령 안에서 이방인을 거룩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로 드리는 일이었다(롬15장). 이는 바울이 제사장 나라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이 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사장 제도/시스템을 통해 거룩함을 유지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백성의 거룩함을 위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성전에서 백성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림이다. 분향단, 등대, 떡상의 내성소 일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 드리는 일들도 있지만 그 모든 일들을 속죄제사 하나로 포괄함이다. 속죄제사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역이나 그 일은 많은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 이스라엘 전체에 성막/성전은 단 하나이며 백성은 우리처럼 매주일 제사 드리러 오지 않고 일 년에 세 번, 절기에만 온다. 그 일주일씩 드려지는 세 번 절기에 모든 제사장은 성전에서 희생제사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 나머지 시간은 몇 명씩 반차대로 성전에 가서 제사장 일을 하되 그때 오는 백성들의 희생제사를 감당하면 된다. 그러므로 제사장 개인이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사역을 감당함은 다 합쳐도 한 달이 채 안된다. 나머지 열 한달동안 제사장(후에는 레위인 포함)은 뭐하는가?

- 둘째, 거룩과 속된 것을 구별해준다. 제사장(레위인)들은 주로 여섯 도피성(납달리의 게데스, 동 므낫세의 바산골란, 서 므낫세의 세겜, 갓의 길르앗라못, 유다의 헤브론과 르우벤의 베셀)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그 지역 백성들에게 율법에 따라 거룩과 속된 것을 계속 판별해준다. 레위지파는 자기 기업이 없다. 그들은 여러지파 속에 들어가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레위인들로 인해 율법이 정한 정결한 규례로 살아가게 된다. 또한 부정해진 백성은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하게 되었는지 판결받는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거하시도록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함을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역할이다.

- 셋째,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거룩함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 중 가장 많이 하는 임무요 주된 일이다. 제사장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율법을 가르쳐 그들이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깨우치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이 세 가지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고 이방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자원봉사가 아닌 전임사역으로 부르셨다.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이 직무를 하도록 돕기 위해 율법으로 명하신 것이다.

- 말라기 시대에 백성들은 십일조를 등한시 했고(3장) 제사장들은 병든제물로 제사를 드렸다(1-2장) 십일조가 없어 제사장들이 그런 제사를 드렸는지, 제사장이 타락해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나 어쨌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나라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시스템(제도)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사사시대 떠돌이 레위지파 소년이 미가의 가정 제사장이 되고 후에 단지판의 제사장이 된 것을 기억하라. 그는 왜 떠돌아 다니며 사설 제사장이 되었는가?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살수 없기 때문이다. 사사시대 영적혼란은 십일조의 부재로 제사장 새스템의 붕괴에 기인한다. 이는 약 400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세우실 하나님 나라 언약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학개의 성전건축과 말라기의 십일조 설교는 하나님 나라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동일한 메시지이다. 이를 교회건축과 십일조헌금으로 직접 대입시켜서는 안된다.

(3)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십일조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언약이 시작된 오늘 우리는 십일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 십일조는 구약의 제사, 절기와 같이 폐지시켜야 하는가? 아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지속해야 한다. 마치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완성된 것처럼, 우리는 동일한 십일조를 드리되 구약의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신약의 십일조를 드리자.

- 첫째,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의 십일조가 되셨다.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한 우리도 새하늘과 새땅, 만물의 회복을 위한 첫열매요 십일조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조물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했고(약1:18) 바울은 우리가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맏아들이라 했다(롬8:30). 헌금만 십일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임을 명심하자.

- 둘째, 십일조는 율법의 의무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로운 결정이다(갈5:1). 신약교회의 모든 것들은 두려운 의무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으로 세워졌다. 종은 두려워하며 억지로 율법을 지키지만 아들은 자유하며 넉넉하게 지킨다. 구약의 제사 절기 등 모든 율법규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되고 완성되었듯 십일조도 그러하다. 우리의 십일조에는 구약의 의미가 더 이상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다. 성도는 구약율법을 지키려 십일조 드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하며 드린다. 종은 안 드리면 벌받을까 억지로 십일조 드리지만, 우리는 아들로서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기뻐하며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린다.

- 셋째, 십일조는 나의 죄를 이기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세상은 맘몬(돈)의 종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맘몬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사탄은 세상사람들을 돈으로 지배한다. 사람들은 돈으로 향락을 얻고, 삶의 두려움도 돈으로 이긴다. 그들에게 돈은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해주는 신이다. 돈은 하나님과 동등한 주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마6장).

-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직 그 부자청년에게만 말씀하셨다. 부자청년 마음속에 물질에 대한 욕심, 또는 물질로 인한 안심(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보시고 말씀함이다. 십일조를 드리며 우리는 맘몬/사탄에게 정면으로 선포한다. “모두 너를 왕으로 섬기지만, 너는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나는 너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너는 내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도 생활이 모자라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이는 산술적 계산과 맞지 않는 하나님 자녀의 신비이다. 물론 넉넉하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궁색하거나 초췌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가난에 처해도 괜찮고 부유함에 처해도 괜찮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넉넉하게 이긴다.

- 넷째,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직접 참여하는 도구이다. 한국교회는 십일조로 부흥하고 성장했다. 선교사들이 여러나라에 똑같이 복음을 전했지만 유독 한국교회만 놀랍게 정착된 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다. 이 정책은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개척 하는 것을 골자로 했고, 그 일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열정적인 십일조 헌금으로 가능했다.

- 요약하면 십일조는 율법에서 폐지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드려진다. 신약성도들은 율법의 의무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그것은 우리 삶 전체를 드리되, 구체적으로 돈에 있어서 종의 의무가 아닌 하나님 자녀로의 자유롭게 드린다. 십일조는 우리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는데 죄를 이기는 유익한 수단이며 우리의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됨을 실제로 체험하게 한다.

<결론 및 적용>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1) 교회는 성도의 십일조 금액을 평가할 수 없다.

- 우리교회 헌금설교가 별로 없는 것은 성경을 연속적으로 강해해 가는데 헌금주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나 헌금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가 아니며 우리교회는 성도들에게 듣기 좋은 말로 위로만 해주는 거짓교회도 아니다.

(2)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